제9장

윤진아는 환자복 차림으로 강태준의 부축을 받으며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윤진아가 발을 헛디디자 강태준은 재빨리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는 나지막이 나무랐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눈에는 다정함이 가득했다.

그의 어깨에는 윤진아의 가방이 걸려 있었고, 그는 그녀의 걸음걸이에 속도를 맞추고 있었다. 손짓 하나, 몸짓 하나에 다정함이 묻어났다.

두 사람은 인파 속에 섞여, 누가 봐도 금실 좋은 부부의 표본이었다.

김지연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말이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그가 그녀와 산부인과 검진을 받으러 왔구나.’

알고 보니 그도 다정하게 사람을 대할 줄 아는 남자였다. 단지 자신에게만 쌀쌀맞았을 뿐.

문득 강태준이 이쪽을 쳐다봤고, 두 사람의 시선이 예고 없이 마주쳤다.

이제 와서 못 본 척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강태준은 윤진아를 놓고 성큼성큼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서는 방금 전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여기서 뭐 해?”

김지연은 벌떡 일어나 검사 결과지를 등 뒤로 숨기며 긴장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추궁했다.

“뭘 숨기는 거야. 이리 내봐.”

김지연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부, 부인과 질환이라서….”

그때 윤진아가 다가와 한쪽 팔로 강태준의 팔짱을 끼며 눈웃음을 지었다.

“태준 오빠, 여자한테 왜 그렇게 쌀쌀맞게 굴어. 저분 놀란 것 좀 봐.”

강태준의 표정이 즉시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 소개하는 걸 깜빡했네. 진아야, 이쪽은 김지연 씨.”

윤진아가 환하게 웃었다.

“오빠가 소개해 줄 필요 없어.”

그러고는 얼굴을 돌려 김지연에게 다정하게 인사했다.

“언니, 우리 자매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내가 돌아온 거 알면서 집에 초대도 안 해주고. 언니 주려고 선물도 준비했는데.”

강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두 여자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윤진아가 웃으며 설명했다.

“우리 둘이 닮지 않았어? 내 친언니야. 나는 아빠 성을 따르고, 언니는 엄마 성을 따랐거든.”

강태준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3년 전, 할아버지가 억지로 김지연과 결혼시키면서 그를 서재로 불러 신신당부했었다.

“지연이는 내 오랜 친구의 손녀다. 그 아이는 집에 식구도 거의 없으니 네가 잘 보살펴 줘야 한다. 서럽게 만들면 내가 죽어서 친구 얼굴을 어떻게 보겠냐.”

방금 윤진아의 말을 듣고 나니 김지연이 사기 결혼을 한 것 같았다. 엄마도, 아빠도, 여동생도 멀쩡히 있는데, 대체 어떻게 할아버지를 속여 넘긴 건지 알 수 없었다.

김지연은 어색하게 옆에 서서 입술만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진아가 강태준의 팔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태준 오빠, 나 좀 추워. 병실 가서 겉옷 좀 가져다줄래?”

강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떠나기 전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윤진아의 손에 쥐여 주며 뜨거우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강태준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윤진아는 보온병을 열어 한 모금 마셨다.

“태준 오빠는 정말 세심해. 내가 60도 정도의 미지근한 물을 좋아하는 걸 알고 한참 식혀서 담아왔다니까.”

그러고는 김지연을 나무랐다.

“언니, 내가 몇 년 동안 외국에서 치료받느라 집에 없었다고 어떻게 아빠를 한 번도 안 찾아가 볼 수가 있어? 아빠가 언니랑 할머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그 해에 엄마랑 내가 아빠 집으로 들어왔을 때, 할머니가 화가 나서 우리랑 연을 끊고 언니만 데리고 따로 나가 사셨잖아. 아빠는 거의 한 달 동안 식사도 제대로 못 하셨어.”

김지연은 코웃음을 쳤다.

“강태준은 이미 멀리 갔으니 그만 연기해. 그 해에 우리가 떠난 후로 윤성우는 할머니한테 전화 한 통 한 적 없어. 나중에 할머니가 위독해져서 내가 의사 선생님 좀 알아봐 달라고 찾아가 빌었을 때도 병문안 한 번 오지 않았지. 그 사람이 식음을 전폐했다면, 할머니 손에 있던 지분 10%가 탐나서 그랬겠지?”

윤성우는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겨우 상장한 수준이었다.

김지연이 중학생일 때 엄마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를 치른 바로 다음 날 윤성우는 윤진아 모녀를 집으로 들였다.

할머니는 윤진아 모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창피하다며 윤성우와 크게 다툰 뒤 김지연을 데리고 나가 따로 살기 시작했고, 그 후로 왕래가 끊겼다.

김지연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엄마의 죽음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줄곧 그 교통사고가 윤진아 모녀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지 못했다.

김지연의 말이 정곡을 찌르자 윤진아는 제대로 약이 올랐다.

“어떻게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언니는 아빠 친딸이잖아. 아빠가 돈 버느라 얼마나 힘드셨는데. 언니랑, 밥하고 청소밖에 할 줄 모르는 언니 엄마까지 먹여 살리느라 고생하셨다고. 13년이나 애지중지 키웠더니 어떻게 이런 배은망덕한 사람이 될 수가 있어? 정말 아빠 대신 내가 다 억울하네.”

김지연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 자리를 뜨려다, 그녀가 자신의 엄마를 헐뜯는 말을 듣자 심장이 조여 오는 듯했다.

“우리 엄마 욕하지 마. 엄마는 아주 좋은 분이었고, 윤성우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어. 그리고 그 교통사고,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 조사할 거야. 반드시 범인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고, 악한 놈들은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엄마가 일찍 죽은 건 그냥 운이 나빴던 거지, 누굴 탓해?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지분 배당금, 그동안 언니가 다 써버린 거 아니야? 그 돈 당장 내놔!”

김지연은 기가 막혔다.

“윤성우가 자수성가한 줄 알아? 처음엔 우리 엄마 돈으로 사업 시작했어. 넌 나보다 겨우 한 살 어린데, 그는 우리 엄마 돈으로 사업하면서 동시에 첩을 두고 사생아까지 낳은 거야. 너도 우리 엄마 돈으로 자란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나한테 돈을 내놓으라고 해?”

윤진아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누구더러 첩이래? 똑바로 말해!”

아랫배에서 다시 희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김지연은 검사 결과지를 쥔 채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답답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방금 의사 선생님이 감정적으로 흥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녀는 이 미친 여자를 떨쳐내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뱃속의 아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윤진아는 끈질기게 따라와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말 똑바로 하고 가! 누가 첩이라고 했어?”

김지연은 팔의 상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팔을 한 번 뿌리쳤다.

“첩은 첩이지. 남의 가정을 파탄 낸 사람은 천벌을 받아 마땅해. 저질러 놓고 남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무서워?”

쿵—

김지연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윤진아가 바닥에 넘어져 있었고, 그녀의 손에 있던 보온병이 멀리 굴러갔다.

그녀는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그저 상처를 건드리는 게 아파서 손을 뿌리쳤을 뿐, 사람을 밀어 넘어뜨릴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

살기 어린 기운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당장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강태준의 얼굴이 보였다.

“김지연!”

그가 그녀의 이름을 외치자 김지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다.

“나… 안 밀었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해명했지만, 그 말은 스스로 듣기에도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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